2007년 04월 15일
sf적 상상력

 바로 전 글과는 무관하다. 

 연필로 하얀 여백을 쓱쓱 채워나갈때, 그것이 글씨든 그림이든 간에 이런 경우가 종종 있다.
 머리속에 담겨진 개념, 영상이 내 손을 통해 발현되는 순간, 현재진행형으로 그것들이 모두
 휘발되어 버린다. 그때의 난감함, 당혹스러움이란.

 커트 코베인은 그의 집 차고에서 자살했다. 그가 마지막 순간에 사용한 도구가 샷건이든 장
 총이든 그 무엇이든 그것은 중요하지 않다. 내가 말하고 싶은 건 머리가 휑 하니 날라간 한
 장의 사진이다. (그의 자살 현장 사진을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)  그 처참한 현장에서 난
 내가 그토록 좋아했던 그의 얼굴을 도저히 찾아볼 수도, 떠올릴수도 없었다. 그의 머리에서
 그의 손 끝으로 이어진 음악들은 샷건이 머리를 관통하는 그 순간 부연 담배연기처럼 흔적
 도 없이 단지 희미한 향취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. 

 내가 그렇다. 난삽한 도색 잡지더미, 어지러운 그런지 음악, 어두운 차고 안, 널부러진 술병
 과 담배 꽁초, 진한 악취, 이 모든 것들이 내 머리속을 지배하고 있다. 그 안에 숨겨진 보석
 을 힘들게 찾고 그것을 내 밖으로 표현하려 하면 난 마치 커트 코베인의 그 날라간 머리처럼
 하얀 블랙홀 속으로 빨려들어간다. (재미있게도 지금 radiohead의 creep 어쿠스틱이 흐른
 다. 정말 우연하게도) 그때의 난감함, 당혹스러움 덧붙여 목청에서 끓는 욕지거리란. 

 그래서 이런 상상을 한번 해본다. 내 머리에 색색의 단자를 꼽고 아답터를 통해 흰 종이에
 글이든 영상이든 정리되지 않은 꿈틀거리는 모든 생각들이 자동으로 기록된다면. 물론 그
 것들을 다듬고 체계를 세우는 건 온전히 나의 몫이다.(난 걸리버 여행기의 '텍스트 자동 생
 성 기계'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. 난 어디까지나 창작은 '주체'의 순수한 영역으로 남겨져야
 한다고 생각한다.) 단지 순간의 발상, 영감의 흔적, 카메라 워킹, 이미지, 상징들, 궁금증
 들을 비롯한 내가 찰나에 떠올린 창작의 소스들을 '메모'만 해주면 된다. 여기서 한가지 의
 문이 들 수 있다. "그럼 당신이 직접 메모하면 되지 않는가?"

 그건 조금 다른 문제다. 난 언어를 광활한 우주, 세계로 본다. 그것은 우리가 세상과의 피
 드백을 통해 또하나의 우주-나 자신-를 창조하는 수단이자, 세상 그 자체이다. 하지만 동
 시에 언어는 그 태생상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. 언어는 최소 단위다. 이게 장점이자 단
 점이다. 최소의 의미만 전달하고 나머지는 무한한 개인의 영역으로 존중한다는 말은  그
 '최소 의미' 외에 나머지 요소들은 무시된다는 것과 같다. 말이 조금 이상하게 꼬였는데
 다시 말해 "언어는 그 그릇이 담을 수 있는 내용물, 즉 언어 속에서 완결성을 가질 수 있
 는 최소의 본질적 의미 외에 나머지 아우라들을 무시한다." 

 내가 포스트잍을 들고 다니면서 언제 어디서나 메모를 할 수 있다고 치자. 하지만 난 단
 순히 언어, 그것도 수많은 언어들 중 하나인 한국어를 가지고 내가 생각하고 느낀 모든
 것을 포착할 수 있을까? 그림의 경우에도 사진의 경우에도 녹음기의 경우에도 마찬가지
 다. 그럼 한번에 다 하면 되지 않느냐고? 사실상 그건 불가능하다는 걸 차치하더라도 문
 제는 여전히 남는다. "무슨 수를 쓴다하더라도 그 '아우라'는 담을 수 없다" 

 발터 벤야민은 '아우라'란 용어를 사용하면서 그것은 "가깝고도 먼 어떤 것의 찰나적인
 현상(einmalige Erscheinung einer Ferne, so nah sie sein mag)"이라 정의하였다.
 <네이버 백과사전 인용> 덧붙이자면 '아우라'는 '자연 대상의 분위기'다.  즉 요점은
 '현존성'이다. 명멸하는 나의 영감을 있는 그대로, 그 분위기 그 느낌을 오롯이 기록해
 주는 기계. 내가 떠올린 세계를 그대로 "재현"해 주는 기계. 어려운가? 난 오징어를 곱
 씹으며 곰곰이 생각한다. 그리고 유성처럼 지나간 생각을 곧바로 메모하려 노력하지
 만 메모하는 그 순간에도 난 유성이 밤하늘에 남긴 궤적을 쫓아갈 뿐이다. 본질인 유
 성은 포착하지 못한채. 

 어쩌면 이건 나만의 문제일지도 모른다. 입대하고나서야 난 내가 얼마나 건망증이 심
 한 인간인지 깨달았다. 집중력, 기억력이 극도로 떨어지는 인간이라서 이런 쓸데없는
 고민을 하는지도 모르겠다. 이런. 

  
 
 
    
 
by 하랑 | 2007/04/15 19:27 | 백일몽 | 트랙백 | 덧글(1)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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Commented by 하랑 at 2007/04/15 23:37

흥미로운 댓글 발견.

"많은 생각의 자유를 누리면 그만이지 그걸 다 뭐하러 기록하려 하나요.
영혼을 기록하려 하시나요 그런 능력은 애초에 없죠.
머리속을 스쳐가는 모든걸 다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.
그러나 사람 각자의 몫이 다 다르기 때문에 전달이 안될 수도 있겠죠.
생각들을 여과하여 기록하고 깨끗한 여백을 날길 수 있는 능력이 진짜죠."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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